오피니언 > 칼럼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함흥차사 박순(朴淳)과 그의 임씨(任氏)부인
최재호의 인문학산책-<10>
 
서부신문 기사입력  2019/11/08 [10:16]

 

최 재 호

고봉(高峰)인문학경영연구소장 / 전 건국대 교수(경영학)


조선조 개국공신으로 함흥차사(咸興差使)를 자원하였던 박순(朴淳, ? ~ 1402년)의 아버지는 군사(郡事) 문길(文吉)이며, 본관은 음성이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나서던 이성계의 막료로 위화도회군의 불가피성을 강조한 이성계의 글을 우왕에게 전달하였고, 조선이 건국되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삼군부를 관장하는 지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이후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태조 이성계가 왕좌에서 물러나 태상왕의 자격으로 함흥에 머물고 있을 당시 태종의 명을 받아 문안사(問安使)로 파견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은 첫째 부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다섯째 아들 방원(芳遠)이다. 그러나 태조가 계비(繼妃) 강(康)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방원을 지지하는 세력과 세자 방석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이때 방원이 당시 11살의 세자 방석과 그를 옹호하던 정도전(鄭道傳) 등을 죽이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자, 이에 분개한 태조는 차남인 방과(芳果,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고향인 함흥으로 가서 머물게 되었다. 이후 정종으로부터 임금 자리를 이양받은 방원, 즉, 태종(太宗)은 태조의 노한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여러 차례 문안사를 보냈지만, 태조는 그들을 모두 죽여서 죽음의 사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처럼 매번 문안사가 돌아오지 않자, 다음 문안사로 자원하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다. 바로 이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순이 문안사로 갈 것을 자청하고 나섰다.

 

박순은 그간의 다른 사자(使者)들과는 달리 하인도 거느리지 않고 스스로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으로 출발하였다. 이윽고 태조가 머무는 본궁 근처에 이르러 길옆 나뭇가지에 새끼 말을 매어놓고, 어미 말 만 타고 궁으로 향하였다. 이때 어미 말이 머뭇거리면서 뒤를 돌아보고 새끼를 부르며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태조가 그 이유를 묻자, 박순이 아뢰기를 "새끼 말이 행로(行路)에 방해가 될 것 같아 나뭇가지에 묶어 놓았더니,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이어 박순이 ”황공하오나, 비록 미물이라 할지라도 지친(至親)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라고 아뢰자 태조도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지 용안이 어둡게 변하였다. 그리고 몇 날이 지난 다음, 박순과 태조가 장기를 두고 있는데, 마침 지붕 처마 끝에서 새끼 쥐가 바닥으로 떨어져 거의 죽음에 이르렀는데, 어미 쥐가 달려와 새끼 쥐를 끌어안고는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 이때 무사들이 쥐를 잡으려고 하자 박순이 이를 말리면서 태조 앞에 엎드려, “전하! 잡혀 죽을 줄 알면서도 새끼를 두고 도망가지 못하는 저 어미 쥐와 새끼 쥐의 모습이 몹시 갸륵해 보입니다”. 마침 태조도 감동한 듯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에 박순은 장기판을 제쳐놓고 엎드려 눈물로 간절하게 아뢰자, 마침내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의 허락을 받은 박순이 급히 하직 인사를 올리고 자리를 뜨자, 태조를 모시던 신하들이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면 훗날 태종이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으로 판단, 박순을 죽여야 한다고 태조를 공박하였다. 태조는 박순이 이미 용흥강(龍興江)을 건너 한양으로 향하고 있을 줄로 믿고, 부하들에게 어검(御劒)을 내어주면서 그가 강을 건넜으면 쫓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박순은 갑작스런 배탈로 하루 밤낮을 뱃사공의 집에서 지체하다, 박순이 겨우 배에 올라타려는 순간 이성계의 부하들이 달려와 어검으로 그의 허리를 베었다. 이때 생겨난 말이 신체의 '반은 강물에 떨어지고(半在江中), 반은 배 안으로 떨어졌다(半在船)'라는 말이 생겨났다. 박순의 부음을 들은 태조는 자신의 경솔했던 행동을 자책하며, “내 그에게 한 말을 저버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함과 동시에 용흥강가에 서원을 세워 그의 혼을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또한 박순의 부인 장흥임씨(長興任氏)는 남편이 무사하기를 밤낮으로 빌었으나, 한 달 만에 흉보(凶報)를 접하고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음을 한탄하며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박순과 그의 부인의 죽음을 접한 태종은 살신성인으로 임무를 수행한 박순의 공적을 공신록에 올리도록 하였다. 또한 자결한 부인에게는 정경부인으로 추증과 동시에 생전에 박순 부부가 살았던 파주와 고양지역에 걸쳐있는 일대의 산야(山野)를 하사하여 묘지와 함께 열녀문을 세우게 하였다. 한편 함흥 용흥강가의 용강서원(龍江書院)은 지난 1980년대 후손들에 의해서 부인의 묘역 근처로 옮겨져 봄, 가을로 제향(祭享)되고 있다. 박순의 벼슬에서 유래한 세칭 부사문동(府事門洞)으로 불리던 현재의 고양시 성석동 일대 황룡산(黃龍山) 자락이 바로 그곳이다. 깊어가는 가을 역사의 향기를 느끼기에 적합한 코스이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공감
기사입력: 2019/11/08 [10:16]  최종편집: ⓒ seobu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