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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족과 천고마비(天高馬肥)
최재호의 인문학산책-<9>
 
서부신문 기사입력  2019/10/08 [10:26]

  


최 재 호

고봉(高峰)인문학경영연구소장 / 전 건국대 교수(경영학)



하늘은 높고 공기는 상쾌하며, 햇곡식이 나와 입맛을 돋우는 낭만적이고 풍성한 계절, 이럴 때 누구나 한 번쯤 되새겨 보는 말이 ‘천고마비’이다. 하지만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원래의 뜻은 우리 한국인에게나 중국인 모두에게 그렇게 낭만적으로만은 태어나지는 않은 듯하다. 중국인들에게 천고마비는 바로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족들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담고 있다. 그리고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저간의 어려움 속에서 모처럼 좋은 계절을 만났으니 글이라도 한 자 더 읽으며 열심히 노력하자는 다소 가벼운 의미가 들어있는 듯하다.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하여 중국 북방에 터를 잡아 온 흉노(匈奴)족은 은(殷)나라를 거쳐 주(周), 진(秦), 한(漢)의 삼왕조(三王朝)와 육조(六朝)에 이르는 근 2000년 동안 중국의 북쪽 변경 농경 지대를 끊임없이 침공하여 약탈을 일삼았던 강인하고 용맹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고대 중국의 군주들은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항상 고심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연(燕), 조(趙), 진(秦)나라가 북방 변경에 성벽을 쌓았다. 그리고 중원의 천하를 통일하였던 진시황이 기존의 성벽을 수축하고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기동력이 뛰어난 흉노의 침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흉노족은 중국의 북쪽에서부터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 일대에 광활한 초원을 배경으로 방목과 수렵으로 살아가는 타고난 기마민족이었다. 이 같은 흉노로서는 우선 초원이 얼어붙는 긴 겨울 동안 먹고살아야 할 양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다행히 봄부터 여름까지 풀을 잘 먹은 말들은 가을이 되면 토실토실하게 살도 오르고 힘도 좋아진다. 겨울이 되기 직전, 튼튼해진 말을 타고 번개처럼 국경을 넘어 들어가 곡식이며 가축을 탈취하여 바람처럼 사라지는 흉노를 중국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을만 되면 중국의 각 왕조나 백성들로서는 언제 또다시 흉노가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국경을 수비하는 병사들은 활줄을 갈아 매고 활촉과 칼을 갈며 경계를 강화해야 했다. 여기에 시인 두보(杜甫)의 조부인 두심언(杜審言)이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변방으로 떠나는 친구 소미도(蘇味道)를 위로하기 위해 적어 보낸 오언율시(五言律詩)가 오늘날 천고마비란 사자성어를 탄생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두심언의 오언율시 내용은 ‘구름은 깨끗한데 요사스러운 별이 떨어지고(雲淨妖星落)/ 가을 하늘이 높으니 변방의 말이 살찌는구나(秋高塞馬肥)/ 말안장에 의지하여 영웅의 칼을 움직이고(馬鞍雄劍動)/ 붓을 휘두르니 격문이 날아온다(搖筆羽書飛)’이다.

 

또한 송(宋)나라 때 이강(李綱)이란 사람이 임금께 보내는 전고(戰告) 정강전신록(靖康傳信錄)에 ‘신(臣)은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찌면 오랑캐들이 다시 쳐들어와 이전의 맹약을 책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臣恐秋高馬肥, 虜必再至, 以責前約)’란 내용이 있다. 이상의 글에서 보듯이 중국인들의 글에서는 추고마비란 구절은 있지만 천고마비란 말은 없다. 즉, 중국인들의 추고마비는 한마디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때가 되었으니 적들이 지금쯤은 반드시 우리를 쳐들어올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므로, 우리 모두가 국방에 더욱 마음을 쓰자는 말로 압축된다. 이런저런 사정을 모르는 우리나라의 학자 한 분이 모처럼 중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였다가 중국의 식자(識者)들 앞에서 자랑삼아 우리 식으로 천고마비 계절을 운운하였다가 저들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하는 바람에 어찌할 줄을 몰라 난감해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국 천고마비라는 말은 추고마비에 빗대어 가을철 좋은 계절에 맞아 책이라도 한자 더 읽고 실력을 쌓으라는 우리식의 사자성어임이 분명해 보인다. 지난날 유년 시절 놀기에도 바빴던 좋은 계절에 ‘독서주간’이라며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오라던 선생님이 야속하게만 느껴지던 추억을 되새겨 볼 일이다.

사서(史書)에 의하면 로마제국과 유럽대륙을 떨게 만들었던 훈족(The Huns)과도 상당한 연관이 있다는 흉노족은 과연 우리와 어떤 관계일까? 일찍이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은 한민족과 흉노족은 ‘뿌리를 같이하는 분리된 동족’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 김씨나,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를 비롯하여,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성계 등이 모두 흉노족의 후예들이다. 실제로 조선조 이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한민족과 흉노족 사이에는 언어나 생활양식 등 모든 면에서 상당한 부분 같거나 유사하였다고 한다. 천랑기청(天朗氣淸)! 하늘은 높고 공기는 맑아 마음까지 상쾌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우리로서는 잠시도 한가할 틈이 없다. 하지만 요즘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너무도 혼란스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하루빨리 그 옛날 만주벌판을 달리던 기상을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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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08 [10:26]  최종편집: ⓒ seobu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