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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의 이(李)밥과 성계육(成桂肉)
최재호의 인문학 산책-<8>
 
서부신문 기사입력  2019/09/02 [11:22]

 

최재호 - 고봉(高峰)인문학경영연구소장 / 전 건국대 교수(경영학)

 

 

1388(고려, 우왕 14)년 중국 명(明)나라가 우리의 함경도와 강원도 사이에 있는 철령(鐵嶺) 부근에 임의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고, 그 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요동도사(遼東都司) 관할권 아래 두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반발한 고려는 즉각 최영(崔瑩,1316~1388)을 팔도 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李成桂,1335~1408)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 정벌에 나섰다. 왕명에 따라 정벌군을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이성계는 더 이상의 진격을 포기하고 송도(松都,개경)로 역진격(逆進擊)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서경(西京,평양)에 머물면서 요동 정벌을 지휘하던 우왕(禑王)과 최영 장군은 급히 송도로 돌아와 반란군 이성계에 대항하였으나, 급히 조직한 병사들로 정규군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성계의 병사들에게 체포된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되었고, 최영 장군은 고봉현(高峰縣, 현재의 고양시)으로 귀양 보내졌다. 하지만 최영 장군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백성들의 원성이 커지자, 최영 장군을 경남 합포(合浦)와 충주 등지로 여러 차례 귀양지를 변경시키며 백성들의 동요가 가라앉기를 바랐지만, 백성들의 원성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렇듯 백성들의 반발 속에 최영 장군을 처형하고 국권을 휘어잡은 이성계 일파의 신진사대부들이 민심을 돌리기 위해 급히 마련한 것이 전제(田制)의 개편이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과전법을 시행하자 많은 농토가 소작농에게 돌아갔다. 그간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쌀 한 톨 구경하기가 어렵던 농민들은 이제야 제대로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며 반기게 되었고, 이때 만들어진 말이 "이(李)밥"이다. 즉, ‘이성계가 먹게 해 준 밥’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기를 들고, 고려 왕실에 충절을 지키려는 민초(民草)들의 반발은 이성계에게 억울하게 희생된 최영 장군을 장군신(將軍神)으로 모시는 일로 나타났다. 무속신앙(巫俗信仰)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은 대체로 훌륭한 삶을 살았으나, 억울하게 죽어 그 한(恨) 때문에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당시로서 여기에 최영 장군만큼 적합한 인물이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고, 과거 고려에 대한 민중들의 향수는 곧바로 최영 장군의 신(神)을 기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최영 장군의 신은 국태민안은 물론 개인의 수명장수(壽命長壽)를 관장하며, 전국적으로 확산 되면서 도당제(都堂祭)란 이름으로 고을과 마을마다 굿이 행해졌다. 최영 장군 도당굿 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가장 이름난 곳은 송도의 덕물산(德物山) 도당굿이다. 한양을 비롯한 전국 팔도의 유명한 무당들이 총동원되는 덕물산 도당굿에는 재물로 삶은 돼지머리를 놓았는데 바로 이 돼지머리를 ‘성계육(成桂肉)’이라 불렀다. 돼지고기에 이성계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이성계가 돼지(해,亥)띠이기 때문이며, 여기에는 이성계를 모욕하고 반항하려는 의미가 깔려있다. 오늘날 각종 행사에 앞서 지내는 고사(告祀)에 돼지머리를 놓는 풍습과 함께 ‘성계육을 씹어 봐야 고기 맛을 안다’는 말은 모두 이 때에 생겨난 것이다.

 

왕좌에 오른 이성계가 어느 날 삼각산 백운대에 올라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보며, 반나(攀蘿) 넝쿨 휘어잡고 푸른 봉우리에 오르니/ 한 암자가 흰 구름 속에 누워있네/ 눈앞에 들어오는 세상을 모두 내 땅으로 만든다면/ 초(楚)나라 월(越)나라 강남(江南)인들 어찌 받아들이지 않으랴/라며 포부를 펼쳤다. 하지만 말년에 그는 백성들이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성계육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회한(悔恨)에 잠길 때가 많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지 않는 것이 하늘의 이치(理致)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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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02 [11:22]  최종편집: ⓒ seobu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