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칼럼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인상여와 염파의 문경지교(刎頸之交)
최재호의 인문학 산책 -<7>
 
서부신문 기사입력  2019/08/09 [10:23]

 

최재호 - 고봉(高峰)인문학경영연구소장 / 전 건국대 교수(경영학)

 

중국 전국시대 때의 이야기이다.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초(楚)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자신의 밭을 갈다 발견한, 천하제일의 보물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우연한 기회에 입수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사신을 보내 진나라의 15개의 성읍(城邑)과 화씨벽을 맞바꾸자고 제안하여왔다. 조왕(趙王)은 대장군 염파(廉頗)를 비롯한 여러 대신들과 함께 여러 날을 두고 이 문제를 놓고 의논하여 보았지만, 모두들 탐욕스러운 진나라에 화씨벽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만 할뿐, 이렇다 할 대책도, 진나라에 답신을 가지고 갈 사신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환관 목현(繆賢)이 "신(臣)의 문객 중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는데 사신으로 보낼 만하다고 생각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왕이 인상여를 만나보고 그에게 대책을 묻자, “먼저 진나라가 성읍을 준다는 조건으로 화씨벽을 요구하였으니 조나라가 응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조나라에 있게 됩니다. 다음은 조나라가 화씨벽을 주었으나 진나라가 성읍을 주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진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저울질 해 볼 때 우리가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서, 진나라가 잘못을 지도록 하면 좋은 계책이 나을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조왕이 "그렇다면 누구를 사신으로 보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다시 묻자, 인상여가 "대왕께서 마땅히 보낼 사람을 찾지 못하셨다면, 원컨대 신이 화씨벽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인상여가 화씨벽을 받들고 진나라로 들어가 진왕(秦王)에게 화씨벽을 바쳤다. 하지만 그간의 예상대로 진왕은 차일피일 시간만 끌뿐 성읍을 조나라에 할양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인상여가 "그 벽옥(璧玉)에 작은 티가 있는데, 저에게 잠시 돌려주시면 그 티를 알려드리겠습니다."라며 화씨벽을 넘겨받은 뒤 몰래 시종을 시켜 원상태로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완벽(完璧)이란 단어는 바로 이 때 화씨벽이 온전한 상태로 돌아 온데서 생겨난 말이다. 그리고 인상여가 무사히 조나라에 돌아오자, 조왕은 그를 상대부(上大夫)의 자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3년 후(B.C. 280) 진왕 소양이 조왕을 욕보이려는 순간, 인상여가 소양왕을 가로막고 나서서 오히려 진왕을 망신시켰다. 이때의 공로로 인상여는 염파장군보다 품계가 높은 종일품 상경(上卿)에 올랐다.

 

그러자 염파장군은 “나는 평생을 싸움터를 누비며 공(功)을 세웠다, 그런데 입만 놀리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이런 자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만나기만 하면 단단히 혼을 내주고 말 테다.”라며 분개하였다. 인상여는 염파의 말을 전해 듣고는 조정의 어전회의에서도 그와 자리를 함께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출 시에도 염파의 수레가 보이면 급히 자신의 수레를 돌려 마주치는 것을 피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인상여의 시종이 “대감께서는 염파장군 보다 서열이 높으신데, 염파장군을 피하고 두려워함이 너무 지나쳐 보입니다.”라고 하자, 인상여가 “내가 염파장군를 피하는 것은 진왕 때문일세, 진나라가 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우리 조나라에 염파와 나, 두 호랑이가 있기 때문인데, 만약 염파와 내가 서로 다툰다면 우리나라의 장래는 어찌 되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가 가시나무 회초리를 등에 지고 인상여의 집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라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이 죄인에게 벌을 내려주시오.”라며 사죄하자, 인상여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염파를 맞이하며 서로 생사를 초월한 문경지교를 맺게 되었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공감
기사입력: 2019/08/09 [10:23]  최종편집: ⓒ seobu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