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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 둘이 함께 마시면 고상한 경지가 있다.
최재호의 인문학 산책 - <3>
 
서부신문 기사입력  2019/04/09 [10:17]

 

최재호 - 고봉(高峰)인문학경영연구소장 / 전 건국대 교수(경영학)

 

조선 후기 승려로 우리나라 차(茶) 문화를 중흥시키며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의 본명은 장의순(張意恂)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그의 나이 5세 때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당하였는데, 그 때 마침 부근을 지나던 승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5세 때에 출가하여 19세에 해남 대흥사에서 완호(玩虎) 스님으로부터 구족계와 함께 초의라는 법호를 받았다.

 

남도의 외로운 산사에서 수도생활에 여념이 없던 선사(禪師)가 당대를 대표하는 한양의 지식인들과 교분을 쌓고 유(儒)·불(佛)·선(禪)을 논하는 사상적 기반을 넓힐 수 있었던 계기는, 당시 실학의 거두였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당시 다산은 해남에서 가까운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선사가 다산초당으로 그를 찾아가면서이다. 이 때 선사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자 24년의 대 연배인 정약용을 스승으로 모시며 유학과 경서를 읽고, 다선(茶禪)의 진미와 함께 실학정신을 익혔다. 다산의 문하에서 시, 서, 화는 물론 다(茶)까지 익혀 사절(四絶)이란 별칭을 갖게 된 선사는, 그의 나이 30세 되던 해 다산의 두 아들 학연(學淵), 학유(學游) 형제의 주선으로, 상경하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를 비롯하여 장안의 이름난 문사들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 때 선사와 동갑나기였던 추사와는 사상과 종교를 떠나 인간적으로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훗날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선사는 여러 차례 제주도를 방문하여 그를 위로하였는가 하면, 그 중 한차례는 반년동안 제주도에서 추사와 함께 생활을 하였을 정도였다. 당시 선사와 추사의 금란지교를 맺어 준 것은 바로 차(茶)였다. 선사가 곡우(穀雨) 날 이른 아침 아직 채 피지도 않은 찻잎을 따서, 무쇠 솥에 덖어 말리고, 숙성시켜 제대로 된 맛과 향을 살리기 까지는 족히 반년이 넘게 걸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차가 바다건너 추사의 손에 들어갈 때는 아무리 빨라야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立冬)철이다. 선사가 보내준 차를 받아든 추사는 입춘을 기다려 대접을 깨끗이 씻어 장독대에 올려 두었다가, 밤새 빗물이 고여 만들어진 그 입춘수(立春水)로 먹을 갈아 선사에게 남도의 봄소식과 함께 감사의 편지를 쓰곤 하였다.

우리나라 차(茶)의 역사는 고려시대 혜심 진각국사(眞覺國師,1178∼1234)시절 사찰에 차를 공양하는 마을까지 생길 정도로 크게 성행하였으나, 조선시대 불교가 쇠퇴하면서 그 명맥을 잃어갔다. 그러다 조선후기 다산과 초의에 의해서 우리 민족 고유의 다도가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초의선사는 선(禪)과 도(道)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는 우리의 생활 속에 있다는 이른바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주장하였다. 다도를 통하여 현묘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불법의 이치라는 뜻이다. 선사가 집필한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茶書)라 할 수 있는 다신전(茶神傳)에는 차따기(採茶)에서부터 물을 끓이고 보관(藏茶)하는 방법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차의 맛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차를 누구와 몇 명이서 마시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는 것이 선사의 지론이다.

차를 마시는 사람의 수효가 많으면 소란스러워 차 맛을 잃게 되고, 홀로 앉아 마시면 신비로우며, 두 사람이 함께 마시면 고상한 경지가 있다고 하였다. 따끈한 찻잔을 마주하고 고상한 경지를 맞이할 그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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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4/09 [10:17]  최종편집: ⓒ seobu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