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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었는가
최재호의 인문학산책 - <2>
 
서부신문 기사입력  2019/03/08 [10:27]

  최재호 - 고봉인문학경영연구소장 / 전 건국대 교수

우수(雨水)! 하얗게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그윽한 매화 향을 실은 봄소식이 들려 올 것만 같다. 매화는 추운 날씨를 이겨내고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트리면서, 예로부터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온 꽃이다. 옛 선비들은 우수경첩 철이 되면, 보다 먼저 매화꽃을 보기 위하여 눈밭을 가로지르고 설산을 헤매는 이른바 답설심매(踏雪尋梅)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또한 음력 2월을 매견월(梅見月)이라 하여, 뜨락에 심어둔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는 날에는, 가까운 벗들을 불러 함께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매화음(梅花飮)을 즐겼다.

매화는 꽃말 자체가 충실, 고결이다. 우아한 자태와 맑은 향기 그리고 은은한 빛깔을 가진 매화는 일찍이 선비들이 소나무, 대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부르며 아끼고 가까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원급제한 선비가 머리에 매화를 꼽고 “평생을 춥게 사는 한이 있어도 그 향기를 팔지 않겠다(梅一生寒不梅香)”고 임금께 충성을 맹세하는 충절의 꽃이기도 하다. 사육신의 한명으로 자신의 당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지었던 성삼문(成三問)은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는 순간에도, 자신의 꿋꿋한 절개를 꺾지 않았다. 또한 생육신의 한명으로 세조의 부름에 비분강개해 하며 광인(狂人)처럼 살았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평생을 자학과 경세의 삶을 살며 자신의 지조를 지켜냈다.

조선 중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수제자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1529∼1590)과 김굉필의 외증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는 남명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선후배 사이였다. 수우당이 김효원, 오건, 정인홍 등과 함께 남명의 초기 제자였다면, 한강은 최황, 곽재우, 등과 선생의 말년에 합류한 제자이다. 수우당이 59세이고 한강이 45세이던 정해년(丁亥年, 1587) 한강이 대선배인 수우당을 예방한 것에 대한 답례로, 이듬해 봄, 수우당이 한강을 찾았다. 이때 한강은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인 경북 성주 회연(檜淵)에 초당을 만들어 마당에 매화나무와 대나무 등을 심어놓고 백매원(百梅園)이라고 부르며 소요하고 있었다. 수우당이 백매원으로 들어서자 이미 시절은 중춘(仲春)이라 여기저기 복숭아꽃, 오얏꽃이 만발한 가운데, 온 좌중이 매화꽃을 들여다보며 감탄하고 있었다.(최영경, 행록, 수우당실기)

그대가 마당에 매화를 심은 까닭은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정신을 맑게 하여, 흔들리지 않는 기상으로 경천위지(經天緯地)의 뜻을 펼치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하나 지금 매화를 도리행화(桃李杏花)와 봄날을 다투게 하면서, 친구들과 술잔이나 돌리고 있으니, 이는 매화를 매화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던가. 당쟁으로 혼란해진 세태에서 벼슬도 마다하였던 깐깐한 대선배 수우당이 이를 그냥 두고 볼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모처럼 방문한 자리에서 후학(後學)을 대놓고 꾸짖을 수도 없는 일, 수우당은 동자(童子)를 불러 도끼를 가져오게 하여 정원에 있는 매화나무를 모두 찍어버리라고 명하였다.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말리자, 수우당이 이르기를, “매화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백설이 가득한 깊은 골짜기에 처하여 절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복숭아꽃, 오얏꽃, 살구꽃과 더불어 봄을 다투니 너의 죄는 참벌하여야 마땅할 것이나 사람들의 만류로 그만두니 너는 이후로 마땅히 경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니라.”라며 애꿎은 매화나무만을 꾸짖었다.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에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가/ 석양(夕陽)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고려의 충신 목은 이색(李穡)이 쓰러져가는 왕조를 구할 젊은이들을 애타게 기다리며 읊조린 시조이다.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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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3/08 [10:27]  최종편집: ⓒ seobu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