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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최재호의 인문학 산책 - <1>
 
서부신문 기사입력  2019/02/14 [20:24]

 

  최재호 - 고봉인문학경영연구소장 / 전 건국대 교수

 

고대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춘추시대의 서시(西施), 한(漢)나라 때의 왕소군(王昭君), 삼국시대의 초선(貂嬋)과 당(唐)나라 때의 양귀비((楊貴妃)를 꼽고 있다.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이들 4명의 절세가인들 중에서 후세 호사가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인물은, 단연 적국 왕의 후궁으로 기구한 생을 마쳐야 했던 왕소군이다. 왕소군에 관한 역사 기록은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 등에 총 600여자에 불과할 정도로 짧게 기술되어있다.

당시 한나라는 강성한 이웃 흉노(匈奴)에게 매년 여인과 물품을 보내 그들의 침략과 약탈을 막아야 했던 약소국이었다. 이 때 왕소군은 여인의 몸으로 정략결혼의 제물(祭物)이 되어, 황량한 오랑캐의 땅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 같은 그녀의 이야기는 옛 중국인들의 전설이나 구전민담의 좋은 소재가 되었고, 후세의 뛰어난 시인 묵객들이 다투어 이를 시와 소설, 희곡 등의 다양한 문학양식과 버전으로 변형시켜왔다.

기원전 37년, 한(漢)의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가난했던 왕소군은 18세의 나이로 후궁에 간택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초상화를 담당한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받치지 않은 탓으로, 입궁한지 5년이 되도록 황제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흉노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 58∼ BC 31)가 원제의 사위가 될 것을 자청하며 장안(長安)으로 왔다. 이때 원제는 궁녀들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뽑아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시작되고, 한동안 궁녀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호한야가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라, 궁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좋다"라고 원제에게 제안하였다.

원제가 호한야의 제의를 수락하자, 호한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외진 구석에 서 있는 한 여인을 지목하였다. 원제가 호한야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자신도 그간에 보지 못하였던 천하절색이었다. 연회가 끝난 다음 원제가 그간 화공이 그려온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살펴보니, 왕소군의 실제 모습과 그림과는 크게 차이가 있는데다, 얼굴에 커다란 점까지 찍혀 있었다. 뇌물을 주지 않아 왕소군의 초상화에 점을 찍게 된 연유를 알게 된 원제는, 자신을 기만한 죄로 화공을 참수하였다. 그리고 호한야 에게는 혼수를 준비한다는 구실로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받은 왕소군이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말안장에 올라, 흉노의 땅으로 향하기에 앞서,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비파에 실어 연주하였다. 이때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구슬픈 비파 소리에 날개 짓을 잊고 그만 땅으로 떨어졌다(落雁)고 한다. 이후 수 백 년이 흐른 다음 천재시인 이백(李白)은 이 날의 정경(情景)을, ‘소군(昭君)이 옥안장에 옷자락을 스치며(昭君拂玉鞍)/ 말에 올라 붉은 뺨 위로 눈물을 흘리네(上馬啼紅頰)/ 오늘은 한나라 궁녀이지만(今日漢宮人)/ 내일 아침엔 오랑캐 땅의 첩이라네(明朝胡地妾)’라고 읊었다.

또한 이백과 동시대에 살았던 시인 동방규(東方虯)는 왕소군이 흉노의 낮선 풍토에서 상심(傷心)과 망향의 슬픔으로 나날이 수척해 가는 모습을,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가 않네(春來不似春)/ 자연히 허리띠가 느슨해지는 것은(自然衣帶緩)/ 이는 몸매를 위함이 아니라네(非是爲腰身)’라고 묘사하였다.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 창밖엔 춘풍화기가 완연한데, 예나 지금이나 우리네 민초들에게, 봄은 언제나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나만의 기우(杞憂)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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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14 [20:24]  최종편집: ⓒ seobunews.co.kr